한낮의 천문학
2023년 7월 15일
이역만리에 떨어트려 놓아도 그럭저럭 먹고 살 만큼 세상 모든 것들에 둔감하지만, 그래도 좋아하는 취향이 있다. 남자가 할 수 있는 온갖 찌질한 모습이 그려지는 500일의 썸머, 내 신발장에 가득 차 있는 하얀색 신발, 사람 없는 바닷가를 전세 낸 듯 위치한 허름한 민박집, 손맛좋은 할머니 혼자 운영하시는 소주방, 편의점에서 파는 싸구려 와인 그리고 검정치마. 이들 중 내 인생에 가장 영향을 끼친 것을 꼽으라면 단연코 검정치마인데, 다른 인디가수의 노래는 나이가 들어 감정선을 따라 갈 수 없어 잘 듣지 않지만, 검정치마는 십수 년이 지나도 여전히 날 행복하게 한다. 나는 검정치마에 대한 내 집착의 기원을 안다.
17살 내 첫사랑 상대는 바이올린을 매고 학교에 와서 이어폰을 꽂고 내리 자곤 했다. 13년 전이라 모든 기억이 흐릿하지만, 이쁜 얼굴에 세상일에 관심 없는 듯 이어폰을 꽂고 하루를 보내는 모습은 모든 남학생의 마음을 뺏을 만 했다. 가끔 나에게도 이어폰 한쪽을 내어주고 방과 후엔 네이트온으로 서로 듣는 노래를 주고받곤 했는데, 그때마다 우리가 같은 노래를 듣는 사실이 얼마나 좋았는지, 다른 친구들이 알아채도 창피하지 않았다. 그러다 그녀가 겨울에 갑작스럽게 예고로 전학을 갔을 때, 나는 어떻게 하면 그녀를 다시 만날 수 있을까 같은 걸 고민하다 엉엉 울면서 그녀가 좋아하던 검정치마 1집을 사 왔었다. 이게 내 고등학교 기억의 전부다.
엄마는 가끔 이 친구에 대해 이야기하시는데, 그 일 이후, 독서실에 처박혀서 서울에 있는 대학에 갈 거야! 라고 말하는 내 모습을 보시곤 내가 대학에 갈 수 있었던 이유 중의 9할은 그 친구 덕분이라며 고마워하신다. 몇 년이 지나 서로 삶을 열심히 살다가 연락이 닿아 만났었는데, 결과적으로 잘 안됐다. 그 당시 나는 우리가 다시 만난 건 운명이라며 내 모습을 다 사랑해 줄 거라는 환상에 빠져 있었다. 그녀가 무척 싫어하던 담배를 태우고 일에 치여 살면서 자기관리에 등한시하고 자산 증식에만 몰두하며 생일 편지하나 안 써주던 나에 대해 뭐라고 하던 것이 그 당시엔 너무나 싫었고 나는 “우리는 운명인데 날 사랑하지 않는거야? 나는 우리를 위해 열심히 일하는 거야!” 하며 바보 같은 이야기를 했었다. 그녀가 나를 찾아왔던 이유가 돈, 집 따위가 아니었을 텐데 말이다. 500일의 썸머를 100번을 봤어도 운명 따윈 존재하지 않고 만들어 가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 나 자신이 한동안 무척 미웠지만, 지금은 내가 다시 돌아가도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뭐… 그런 시간이 있었으니, 지금은 운동도 열심히 하고, 미국에서 먹고살 걱정 없이 미래를 어떻게 그려나갈지 고민하는 시기에 온 게 아닐까 싶었다. 적어도 지금은 그때 내 자신이 부끄럽다는 걸 아니까 다시 한번 이 친구 덕에 엉망진창인 내가 사람 구실을 하며 살고 있다.
난 평소에 노래를 항상 틀어놓는 타입이라 듣고 싶은 노래가 딱히 없을 땐 디폴트로 검정치마를 틀곤 한다. 예전에 여자친구와 여행을 가다 너 좋아하는 노래 틀어 해 놓고선 막상 듣기 싫어서 검정치마 노래를 듣자고 졸랐던 적이 있다. 여행가는 차 안에서 검정치마 노래를 듣는 게 대수인가 싶지만 그래도 왜 내가 검정치마를 좋아하는지에 대해서 이야기는 해줘야 할 것 같아 예전 기억을 더듬어 가면서 말해줬는데 귓등으로도 안 들으면서 일을 하고 있길래 그냥 알아서 antifreeze를 틀었다. 괜히 옛날이야기를 했나 싶었다.
근데 나도 뭐… 내 여자친구가 세상에서 가장 좋아하는 반신욕에 다른 이유가 있다고 해도 별생각이 없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