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낮의 천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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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7월 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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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어질 결심

#1 안개

"나 홀로 걸어가는 안개만이 자욱한 이 거리. 그 언젠가 다정했던 그대의 그림자 하나. 생각하면 무엇 하나 지나간 추억. 그래도 애타게 그리는 마음.."

헤어질 결심은 실낱같은 사랑의 증거에 죽음마저 각오한 채 자신의 선택을 믿어 의심치 않았던 사람들의 이야기다. 사랑하는 마음이 들 때 언제나 겪는 순간이 있다. 마치 안개로 가득 찬 굽이진 산길을 오르는 것처럼 서로의 마음을 몰라 애를 태우고 사랑한다는 말조차 듣지 못하지만, 작은 동작 눈빛에서 사랑의 증거에 희망을 품는. 이런 앞을 한 치도 못 보는 안개로 둘러싸인 상황에서 사람은 도망치기도 하지만 무엇인가를 굳게 믿은 채 눈을 질끈 감고 안개 속으로 발걸음을 옮기기도 한다. 이런 안개에 둘러싸인 사람의 마음을 스크린에 표현하기 위해선 배우들의 뛰어난 연기력을 차치하고도 특별하고 디테일한 표현 방식이 필요한데, 이 영화는 독창적이고도 다채로운 또 지독하리만큼 쫀쫀한 대비로 감정선을 표현해낸다.

형사와 불법체류자, 산과 바다, 초록과 파랑, 구소산과 호미산, 부산과 이포 그리고 해결과 미결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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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형사와 불법체류자

"서래씨, 나는요, 완전히 붕괴되었어요."
...
"내가 목숨을 걸고 당신을 찾아오지 않으면 내가 어떻게 당신을 만날 수 있습니까?"

해준의 직업은 형사다. 그는 불면증에 시달리며 거의 하루 종일 깨어있는데, 잠복을 위해 잠을 못 자는 것이 아닌 잠에 못 들어 잠복한다. 해준은 미결 사건을 벽에 전시해놓고 끝까지 해결하려고 하는데, 해준에게 가장 큰 기쁨은 이 세상에 질서를 해치는, 특히 살인 사건을 해결하는 것이다. 해준의 품격은 사회 질서를 지키는 데에서 온다. 매일 피곤에 쩔어 눈에 안약을 넣고, 언제든 출동을 위해 12개의 주머니가 달린 정장을 맞추며 자신의 신념을 끝까지 지키려고 한다.

서래는 불법 체류자 출신이다. 시작부터 사회 질서를 해치는 인물이다. 서래는 노인을 간병하는 일을 하는데 이는 불체자 출신으로 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직업이다. 상대가 병들고 힘이 없는 노인이기에 서래가 유일하게 한국인과 대등해질 수 있다. 서래는 중국에서 간호학을 배워 직장에서도 인정받고, 특유의 진심을 다하는 성격으로 노인들에게도 사랑받는다. 하지만 서래는, 체류 허가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해준과는 대조적으로 한국 사회의 질서를 아무리 지킨다 해도 애초에 해준과 이루어질 수 없는 계급상으로 밑바닥인 외국인 여성이다.

이렇게 다른 두 사람은 형사와 용의자라는 미명하에 감시 아닌 감시로, 취조 아닌 취조로 오랜 시간 서로를 관찰하고, 공통점을 깨닫는다. 전 남편이 산에서 떨어져서 죽은 시체를 말씀이 아닌 사진으로 보는 장면이나, 처음 본 사이지만 오래된 부부처럼 먹은 초밥을 착착 정리하는 모습, 둘 다 산이 아닌 바다를 좋아한다는 점, 그리고 서로 소유욕을 가진 아내와 남편이 있다는 것을 보고 둘은 서로가 동족임을 직감한다. 특히 마지막 공통점은 조금 더 극적인데, 기도수는 자신에 소지품 모든 곳에 자기 이름을 써놓는 것뿐만 아니라 자기 아내에게까지 이름을 새긴다. 해준의 아내는 금연을 강제하고 부부관계까지 심혈관계 질환을 이야기하며 정해진 루틴으로 만든다. 반면 해준은 요리 중에도 담배를 태우는 서래를 제한하는 것이 아닌 무던히 재를 털어주고 입에 물려주며 재떨이를 들어준다. 서래는 해준의 중국식 요리를 맛보고 중국식이 아니라고 핀잔하면서도 맛있게 먹는다. 해준과 서래는 그들의 반려자와는 다르게 상대방을 존중해주는 사람들이다.

몇 가지 공통점을 제외하고 모든 것이 달라 현실 세계에서 도저히 만날 수 없는 사람인 해준을 서래가 관심을 가지는 감정선을 따라가려면 서래의 과거를 들여다 봐야 한다. 사실 서래는 한국 사회에 뿌리를 두고 있다. 서래의 조부는 독립군이었고, 그 가족은 한국에 산을 소유했었다. 하지만 한국은 서래의 조부를 잊었고 서래의 산을 귀속했다. 한국에서는 서래를 아무도 알아주지 않고 도와주지 않는다. 오히려 중국으로 추방당할 뻔한 서래를 구해준 말단 공무원 남편은 서래를 상습적으로 폭행한다. 불법체류자이자 기반도 없는 서래가 자신의 원래 계급을 되찾을 방법은 없다. 해준이 나타나기 전까지는.

이러한 상황에서 서래가 해준을 만날 유일한 방법은 사건 일으키는 것이다. 기존 남편이 죽고 13개월 후, 서래는 사짜 애널리스트를 만나 재혼해 해운대의 고층 아파트에서 살지만, 남편이 번 돈은 품격이 없는 사기로 번 돈이라 이를 되찾으러 찾아온 같은 계급의 중국인에게 폭행당한다. 돈이 아무리 많아도 품격이 없는 서래는 해준과 같은 삶을 살지 못한다. 서래는 해준을 다시 만나기 위해 자기파괴를 각오하며 살인을 준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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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산과 바다

"이러려고 이포에 왔어요? 내가 그렇게 만만합니까?"
"내가 그렇게 나쁩니까?"
...
“서래씨는 정말 훌륭한 사람인데 왜 엉망징창인 남자들과 결혼하는거에요?”
“다른 사람과 헤어질 결심을 했기 때문에.."

헤어질 결심은 산으로 시작해서 바다로 끝나는 영화다. 시작부터 끝까지 산과 바다에 대한 모티브로 둘러싸여 있는데 단순히 장소뿐만 아니라 서래의 옷과 장신구, 벽과 가구, 집과 사무실까지 초록과 파랑으로 대비된다. 일반적으로 산은 세상을 아래로 내려다보는 안정적인 장소를 상징하고 바다는 무질서한 파도가 난무하는 혼란과 파괴를 상징한다. 사람은 삶에 대한 의지가 있다면 산에 오르고 의지를 상실하면 바다에 간다.

직업윤리를 중요하게 생각하고 경감에 최연소로 승진할 정도로 사회에서 인정받는 해준은 바다를 좋아하지만 사실 산과 같은 삶을 살고 있다. 반면에 친구도 없고 사회에서 인정받지 못하는 말단 공무원인 서래의 남편은 산을 동경한다. 서래는 자신의 계급에 맞지 않는 말러를 들으며 산을 동경하고 자신을 폭행하는 남편을 본래 위치인 산 아래로 밀어버린다. 이 사건을 조사하기 위해 해준은 기구를 사용해 손쉽게 산을 오르지만, 도움을 받을 수 없는 서래는 손에 상처와 굳은살로 가득해진다. 반면 호미산에서는 다르다. 오랜 기간 염원하던 호미산을 올랐을 때 서래는 비록 공식적인 자기 소유의 산은 아니지만, 짧은 순간이라도, 꿈꾸던 한국 사회에서의 본래 지위를 회복한다. 서래의 입장에서 유일하게 해준과 동등해질 수 있는 순간이다. 가족들에게 믿음직한 남자를 찾았다고 해준을 소개하고 가족을 가족의 산에 뿌려준다. 그리고 해준을 끌어안고 부드러운 손으로 해준을 어루만지며 키스한다.

바다를 좋아하는 서래는 집안을 파도 문양의 벽지로 집을 꾸민다. 파도로 둘러싸인 서래를 해준은 잠복 수사를 하며 감시하는데, 수사의 목적은 상실한 채 밥 대신 아이스크림을 먹고 식후에 담배를 태우는 서래를 걱정한다. 오랜 감시 끝에 의심이 사라진 해준은 관찰을 바탕으로 서래를 보듬어 준다. 서래는 감시당하는 것을 알면서도 친절히 보호받는 것 같아 내심 기분이 좋다. 서래는 해준의 불면의 원인인 미결 사건을 해결하는 데 도움을 주고 범죄 사건 현장 사진을 떼버리고, 숨을 맞추며 잠을 선사한다. 곧 부산에서의 사건은 해결되지만 거의 동시에 해준은 자신이 종료시킨 사건의 진범이 서래인 것을 알게 된다. 해준은 서래와 헤어질 결심을 하고 사건을 재수사하는 대신 서래가 진범이라는 증거인 서래의 아이폰을 바다에 던지라 조언한다. 그리고 서래에게 자신이 붕괴되었다 말한다. 서래는 붕괴라는 단어를 통해서 해준이 자신을 얼마나 사랑했는지 알게 된다. 13개월 후, 이포에서 해준과 서래는 다시 만난다. 이포에서 서래의 애널리스트 남편은 서래의 폰에서 서래의 범행을 해준이 덮어줬다는 것을 발견하고 이를 이용해 서래를 협박을 한다. 해준에게 직업윤리가 얼마나 중요한지 아는 서래는 해준과 헤어질 결심을 한다. 서래는 애널리스트 남편을 살해한 뒤 해준에게 찾아가 부산에서 벌인 범행의 단서가 담긴 아이폰을 건네주며 해결이 된 사건을 다시 수사하라고 한다. 그리고 해준에게 붕괴 이전으로 돌아가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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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해결과 미결

"이제 내 사진을 붙여놓고 잠도 자지 못한 채 계속 내 생각만 하게 될 거야"
...
"휴대폰에 당신이 나에게 사랑한다고 말한 음성파일이 있어요."
"제가 사랑한다고 언제 그랬어요? 무슨 말 하는거에요?"
"당신이 나를 사랑한다고 말을 했을 때 당신의 사랑은 끝이 나게 되었고 
당신의 사랑이 끝이 나자 나의 사랑은 시작되었어."
"어휴 답답해 왜 자꾸 딴소리만 해요. 서래씨 어디 가요?"
...
"서래씨! 서래씨! 어디 있어요?"

해준은 자신의 지위를 포기할 마음이 추호도 없고 그의 품격있는 삶에서 직업윤리는 무엇보다 중요하기에 서래는 해준과 함께 할 수 없다. 심지어 해준이 서래를 지켜준 음성 파일이 담긴 남편의 폰을 바다에 던졌음에도 되돌아왔을 때 서래는 해준과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함께 할 수 없음을 알게 된다. 서래는 해결된 사건은 잊고 미결된 사건은 벽에 붙여놓고 매일 바라보는 해준을 잘 알기에 해준의 미결 사건이 되기로 결심한다. 서래는 모든 증거를 해준에게 전달하고 자신을 다시 수사하라고 한 뒤, 만조가 다가오는 모래사장에서 구덩이를 파고 이과두주를 마시며 자신의 선택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은 채 자기 자신을 던진다. 만조가 된 바닷가, 야속하리만큼 거센 파도를 맞으며, 해준은 서래가 묻힌 모래톱 위에서 자신의 마음을 깨닫고 서래를 목놓아 부른다. 해는 저물어가고 바다는 컴컴해진다. 둘의 사랑은 마.침.내. 영원으로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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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청록

"슬픔이 파도처럼 덮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물에 잉크 퍼지듯이 서서히 물드는 사람도 있는거야."
...
"한국에서는 좋아하는 사람이 결혼했다고 좋아하는 것을 중단합니까?"

박찬욱 감독은 늘 인간의 원초적인 감정을 나타내기 위해 금기를 사용한다. 단지 금기만을 조명하기 위한 것이라면 재미없었겠지만 금기에 이끌릴 수밖에 없는 인간의 나약함을 조명했을 때 금기는 빛을 발한다. 헤어질 결심을 해야 할 만큼 간절히 사랑하는 사이기에 서로를 너무도 지키고 싶어 금기를 선택하는 해준과 서래는 금기를 선택한 대가로 파멸로 향할 것임을 알면서 그 선택이 서로를 위한 유일한 선택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러므로 그들이 선택한 금기는 단순한 욕망을 위해서라기보다 현실에 잔혹함에서 벗어나기 위한 애처로운 노력으로 보이게 된다. 이 영화가 시간이 지날수록 여운이 길어지는 것은 며칠이 지나고 나서야 인간이 어찌할 수 없는 현실을 마주했을 때 이를 저항하기 위해 금기를 선택하는 것이 특별히 악해서가 아니라 무기력하기 때문임을 받아드리고 우리 역시, 애잔한 존재라는 걸 깨닫는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불륜, 살인, 폭행, 사기 그리고 자살로 그려진 영화지만, 나에겐 하나같이 어쩔 수 없는 사랑 영화로 보인다. 나는 당분간 이 영화가 뿌려놓은 안개 속에서 허우적일 것 같다. 아아 박찬욱 정말 지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