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낮의 천문학
2022년 2월 26일
2021년을 정리하며,
#1
요즘 가장 날 실망시키는 건 현실에서의 멍청이들이 인터넷에서는 가장 큰 목청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세상 잡다한 일들에 내 생각은 옳고 너는 이래서 틀렸어, 사과해 라고 말하는 사상은 얼마나 가난한가. 어느 순간인가 부터 상대방에 대한 태도가 기본적으로 평가 및 비판인 부류를 힘껏 피하고 있다.
우린 다 다른 환경에서 자랐다는 것, 다른 상처를 받고 다른 사람들을 만나 다른 것을 먹고 자라 각자 최선을 다해서 성장했다고 존중해주는,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부드럽고 유연하게 바라봐 주는 내 주위 사람들에게 무한한 감사를 전해주고 싶다.
#2
“그래, 내가 왜 세상 다 살아본 사람처럼 사나, 나도 실수 투성 이면서,” 라는 생각을 했다. 상대방의 행동 혹은 말에 한마디 보태지 않기 시작한건, 상대방이 정말 그렇게 생각하길 바란다기 보다 내 입장에서 상대방이 그렇게 생각하기 원했다는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내가 서운하거나 마음 아픈 말을 들어도, 상대방의 말들에 헛점을 파고 들기 보다 내 자신을 바라보며 내가 무엇을 기대한 것인가 하며 되돌아보는 연습을 꾸준히 했다. 나 역시도 아픈 말은 무지 하고 사니까. 그리고 그 것들의 대부분은 내 입장에서 내뱉은 말 들이니까.
나이듦의 좋은 점 중 하나는 상대방 입장에서 한 뼘 다가가서 생각할 수 있는 여유가 아닐까 생각했다. 상대방이 하는 이야기 중 9할은 자신의 이익 혹은 자존감에 결부되어 있다는 사실. 그 사실을 깨닫고 나서는 상대방의 말에 크게 반응할 필요도, 마음 아파할 필요도 없다는 것. 더더욱 상대방을 고치려는 노력은 더더욱 보잘것없다는 것. 이 점에서 오히려 내게 필요한건, 상대방의 기분에, 충고에 진심이 아니더라도 너의 말을 잘 듣고 있어, 라는 가식적인 표정이겠다 싶었다.
#3
시작은 그렇게 안 읽히겠지만 이건 그리움에 관한 글이다.
몇년전 마지막 연애를 끝나고 나서, 나는 연애를 쉬는게 좋겠다고 생각한 순간이 있었다. 좀 처럼 바뀌지 않는 내 자신에 대한 환멸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줄지도 모를 사람을 만나기 위해 한뼘 더 나아지려고 하는 내 자신에 짜증을 느끼며 자기혐오의 끝을 볼 수 있다면 연애안에서만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스탠스에 좋은 점은 불같은 질투나 집착에 아득히 멀어진다는 것이다. 감정은 늙는다는 이야기를 하며 수 많은 번뇌의 순간을 피해가고 좀 더 생산적인 활동에 몰두할 수 있는 그런 자기방어기제였다.
그러다 누군가와 걸었던 수 많은 밤 거리가 이런 방어기제 따위는 쌓아올린 성은 우크라이나에 작은 도시와 같이 손쉽게 정복당할 갸날픈 요새라는 것을 일깨웠다. 코로나로 학생들의 발길에 끊긴 대학교, 등불이 꺼진 수변공원, 늦은 시간 막차가 끊긴지 모르고 들어간 지하철 역사 내, 차들이 사라진 8차선 대로, 주황색 가로등 불 빛이 가득찬 놀이터, 마치 오래전 사람들이 붐볐던 기억만을 남긴채 버려진 공간이기 때문에 더 외로운 곳, 내가 도착하기 이미 한참 전에 수많은 사람들이 서둘러 대피하듯 빠져나갔을 것 같은 기분이 드는 장소 같은 곳을 거닐며 시시콜콜 나눴던 잡담들은 공허하고 강렬한 감정을 일으키기 충분했다. 사람으로 태어난 이상 익숙하면서도 해롭고 잊혀진 줄만 알았던 감정들은 내가 무장했던 방어기제가 얼마나 얄량한지를 알려주는 듯 했다.
점점 잡담이 줄어들고 관계가 시야 밖으로 사라지는 것을 느껴갈 때 쯤, 어느 슬픈 영화의 비련의 여주인공으로 내 자신를 바라보는 대신 일종의 안도감이 들었다. 내가 조금이라도 아프지 않았다거나 잘못하지 않았다는 것이 아니라, 아직까진 내 감정은 그리 늙지 않았구나, 상대방의 단점을 하나하나 곱씹기보다 장점을 힘껏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구나, 사랑하는 것에 현실에서 존재하는 논리 따위를 들이대지 않는구나 같은 안도감 말이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서서히 잊혀져 되돌릴 수 없는 것들이 아직까지는 내 곁에 조금은 남아있구나 하며 작은 위로를 했다.
그러다 문득 분명히 내 두 눈으로 봤지만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는 곳, 그리고 가고 싶어도 갈 수 없는 곳. 그래서 영원히 그리워할 수밖에 없는 장소.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이런 것들에 대한 그리움을 뭐라고 부를까에 대해 생각했다. 알 것 같은데 입 밖으로 나오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