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낮의 천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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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5월 15일

lee

존재하는 물건보다 음악이나 영화같은, 한낱 0과 1로 이루어진 디지털 따위가 왜 더 좋을까 라는 물음을 듣고, 제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서 글을 써요. 짧은 삶을 살아가면서 제 또래들이 즐겨 입는다는 명품 옷가지들은 한번도 사본 적은 없지만, 좋아하는 창작가들의 artform은 가격이 얼마든, 어느 장소에 있던 꼭 소비를 하며 살아 왔거든요.

저는 제가 스스로 좀 피곤한 성격이라고 생각해요. 집을 나갈 때는 항상 작은 불 하나는 켜두고 나가야 마음이 편하고, 우스꽝스러운 문장이 새겨진 티셔츠를 보면 괜히 신경이 쓰여요. 당연히 해야할 것들을 안 했을 때에는 아량있게 넘어가다가도, 제 기준에서 절대 못할 짓을 하는 사람에게는 한 없이 날카로워지기도 하구요. 이레 그냥 지나가면 되는 일들을, 왜 그렇게 느끼는지에 대해서 계속 생각을 멈출 수가 없었어요. 저는 제 내면이 못생겼다는 생각을 해요. 그 생각은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아무리 변하고 배워도 멈출 수가 없어요. 그래서 자존감도 낮았던 것 같고, 사람들에게 진짜 나를 보여주는 게 항상 두려웠어요. 그래서 겉으로는 단순하게 말하고, 단순하게 보이길 원했고, 지금도 그런 게 멋져 보인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이런 피곤한 생각들을 혼자 담아두곤 했어요. 또, 아무리 행복한 순간이 와도 금방 사라질거란 생각에 두려움이 더 먼저 몰려와요. 무엇이든 잃는 경험은 늘어 가기만 하는데, 너무 행복했을 때 사라져 버린 것들은 다른 어떤 것으로도 메꿀 수가 없더라구요. 그래서 뭔가 행복한 순간이 와도 마음이 계속 허전해요. 잃는 것 또한 열역학에서 이야기하는 엔트로피로 설명할 수 있는 같은 자연의 섭리 같은 것일텐데 말이에요.

그런 피곤하고 못난 저를, 예술작품은 특히 영화나 음악은, 항상 변함없이 치유해 주고 친구가 되어줍니다.

애석하게도 저라는 나약한 인간은 나와 비슷한 생각을 누군가 하고 있다는 사실에 위로를 받을 수 있는 존재 같아요. 점점 영화나 음악에 깊게 빠져들 때는 말 그대로 제 영혼이 치유되는 느낌을 받았을 때에요. 제가 평소에 쉽게 꺼내지 못했던 이야기들을 누군가 하는 것을 듣고, 그리고 타인이 가질 수 있는 이야기를 타인의 입장에서 우아하고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방법으로 체험 해볼 수 있다는 사실에 흠뻑 빠져들며 지금까지 살아오고 있어요. 이런 취미를 갖게 되면서 나 자신이 한 발짝 한 발짝 조금 더 나은 사람이 되어 나가는 걸 느껴요. 누군가 깜짝 놀랄 이야기를 할때도, 크게 숨 한번 내뱉고 “아 그럴 수도 있겠구나”하기도 하고, 혹여나 기분 나쁜 일이 생겨도 “어떤 사정이 있겠지, 별일 이 다 있네” 하고 넘기면서요. 조금 다른 이야기지만, 전 그래서 저처럼 마음이 불행한 사람들에게 예술작품 감상을 취미로 가지기를 굉장히 권하는 편이에요. 저는 마음이 불행할 때 예술이 주는 치유의 힘, 독서는 마음의 양식이라는 이런 종류의 말 들을 믿어요.

또한 좋은 작품들은 시간이 지나도 제 역할을 다 하곤 해요. 현실세계에서 실재하는 물건들은 낡고 유행이 지나고 해지는 것과 달리 제 마음에 와 닿았던 작품들은 시간이 지날 수록 다른 깨달음을 주거든요. 하루하루 나이가 들 수록, 단지 우울함만을 노래하는 줄 알았던 이소라의 곡들은 다른 의미로 다가오고, 봄날은 간다의 한은수의 갑작스러운 변심을 곱씹어보기도 하고, Billions, Orange is the New Black, Breaking bad의 주인공들의 선택이 이해가 되는 순간처럼요. 이런 삶들을 대리 체험하지 않을 채 모른 채로 살아갔다면 저는 수 많은 사람들을 미워하고 살지 않았을까 생각을 했어요.

지금까지 제 생각들을 글로 적고 보니 좋아하는 대상이 현실 세계에 존재 하냐, 하지 않으냐가 크게 중요하지 않은 것도 같아요. 그 속에서 자신을 찾아갈 수만 있다면요. 누군가에겐 나이키 범고래일 수도, 탄산수를 넣은 하이볼일 수도 있고, BMW의 실키식스 엔진이든 신주쿠 거리든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든 뭐든 좋다고 생각이 들었어요. ‘진정한 나는 누구인가’를 찾는 과정은 어떤 대상과 자기 자신에 존재하는 거리와 방향을 측정하고 수 시간 관찰하고 판단은 조금만 내리는 일이라 본다면 그 대상이 사물이던 사상이던 크게 차이가 없다고 느꼈거든요. 단지 제가 영화나 음악을 좋아해서 그 속에서 타인의 삶을 바라보고 내면을 들여다 본거라고 생각해요. 정말 중요한건 무엇인가를 힘껏 좋아하고 사랑하는 것이 아닐까 싶었습니다.

저는 긴 세월을 견디면서도 여전히 좋은 것들을 사랑합니다. 제게 익숙한 것과 오랜 시간 동안 제 주위에 그대로 남아있는 것들이 모여 지금의 나를 이루고 있다고 느껴요. 오늘은 좋아하는 조휴일의 노래를 들으며, 좋아하는 카페의 창가 자리에 앉아서, 좋아하는 동해 바다를 보며 땅거미내린 하늘아래 글을 쓰고 있습니다.

짧은 글이지만 부디 답이 되었기를.